본문 바로가기

이곳의 공기/수진이방

바닷가 단상










이 여행을 시작한 지 19개월, 한국에 잠시 다녀온 기간을 제외하면 548일,

지금은 코스타리카의 마지막 마을 playa samara라는 바닷가에 있다.


비로소 바다와 바람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곳.


중미에 오면 다 이런 바다일 줄 알고 매일 할 일 없이 쉬면서 글 쓰고 사진 정리하고 그렇게 보내게 될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는 생각보다 다 '정글'이라 걷고 타고 달리고 나느라(하늘을 날았다구!) 꽤나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왜 우린 이 여행 내내 한 곳에 오래 머물러 보지 못하고 바삐 움직이는 걸까,

혹시 일상에서 바쁘게 살던 관성이나 강박이 남아 있는 건 아닌가 고민해본 적도 있었다.


근데, 여행을 하다보니 그냥 이게 우리의 모습이더라.

가만히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게 더 좋고 새로운 어딘가가 계속 궁금해지는.

(사실 이 부분은 오빠가 나에게 맞춰주는 경향이 훨씬 크다. 인정)


그런 점에서 우리가 걸어온 길이나 길에서 만난 수많은 여행자들이 만들어가는 각자의 루트는 참 흥미롭고 재미있다.

각자의 취향과 속도와 리듬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루트.


여행이 장기가 될수록 남들이 좋다는 곳, 남들이 꼭 가보라는 곳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딜 가느냐보다 내가 즐길 준비가 되어있느냐가 더 중요할 뿐.


여행보다 더 긴 인생이라는 여정도 그렇지 않을까.


때론 여행에 지치고 예상치 못한 사고를 겪기도 하고 집이 그리워지면서도 

그 괴로움이 일상의 스트레스에 미치지 못하는 건

남과 비교할 필요도, 무언가 성취해야할 필요도 없이

우리가 만들어가는 발자취의 기록 그 자체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일상에 돌아가서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

나는 늘 나와 우리의 현재를 살고 싶다.


-


오늘은 바닷가 야자수 아래 그늘에 누워 딩가딩가 하고 있는데 오빠가 물었다. 

여행이 끝나가는데 이 여행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냐고.


응? 정리 해야해? 어떻게 해야하는데?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여행을 통해 달라진 게 있을까?


그동안은 어떤 성찰이나 변화를 위해 시작한 여행이 아니었고

만나는 사람들이 뭐가 달라졌냐 자꾸 묻는게 식상해서 

오히려 왜 달라져야 하냐며 달라진 점들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는데 

갑자기 궁금해져서 오늘 떠오른 것들만.


최악의 부엌을 만나도 냄비 하나로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 수 있게된 점,

날아다니는 모기도 척척 잡아내는 벌레 잡는 오빠의 능력,

면발만 먹고 버리던 라면국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먹게 된 나.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여행을 통해 별로 성숙해진 점은 없다.

더운데 배낭은 무겁고 버스는 안 오고 모기가 막 물면 짜증이 팍팍 나고 

그러다 시원한 바람을 쏘이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헤벌레하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하는 나약하고 철 없는 인간일 뿐.


가끔 여행을 통해 '남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는 등의 예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것만 보인다는 오빠의 명언처럼 나는 그렇게 순진한 말은 할 수가 없다.


여행을 하며 가졌던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함이

 최근 한국의 뉴스를 접하면서는 미안함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요즘,

더이상 돕는게 아니라 함께 변해야 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처럼

길에서 만난 안타까운 사연들도 그런 차원에서 변화가 필요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공감가는 글귀.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중에서












'이곳의 공기 > 수진이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 2014.05.20
바람이 데려다 준 두 번째 안티구아  (3) 2014.05.19
근황, 시원섭섭두근두근귀차니즘.  (4) 2014.03.21
지구 한 바퀴 반.  (4) 2014.03.05
밍글라바 미얀마!  (5) 2014.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