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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공기/수진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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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가본 데가 너무 많아."

"가본 데도 많잖아!"


안티구아에 와서 하루 만에 살아난 나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이번에 가보지 못한 새로운 여행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구 늘어놨다.

진짜 집에 돌아온 느낌이 벌써 드는건가.

미안해 나도 내가 웃겨.


오빤 내 이야기만으로도 너무 피곤해졌는지

안티구아의 찬 공기에 적응하지 못 했는지

그동안 더위 먹고 시름시름하던 나로 인한 긴장이 풀렸는지

안티구아에 와서 하루 만에 몸져 누우셨다.


둘이 번갈아 골골대는 거 보면 쉴 때가 되긴 했나ㅠ

마음은 아직인데ㅠ







상냥하고 맛있고 저렴한 멕시코에서 왔을 때 과테말라는 특별한 인상을 남겨주지 못 했지만

지난 번과 달리 중미의 다른 나라를 지나 과테말라에 돌아오니

여행자들이 과테말라를 왜 좋아하는지 이제 좀 알 것 같다.


안티구아는 여전히 비싸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니카라과를 제외한 나라들보다는 물가가 싸고

다른 중미도시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통복장의 현지인들이 여행자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고

날씨 시원하고 사람들 친절하고.


남미에 비하면 참 다닥다닥 붙어있는 중미의 나라들이지만 나라마다 신기할 정도로 느낌이 달랐다.


가장 미국 같을 거라 생각했던 파나마.

운하 덕분에 인프라가 잘 갖춰져서 중미에서 도로도 제일 좋았고 

시골마을 어딜 가도 교복 입은 학생들을 제일 쉽게 볼 수 있었던 나라이긴 하지만

시티만 벗어나면 미국 같진 않아서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다양한 원주민들이 섬에서, 산에서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있는 곳.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늘보들을 만난 곳:)

반면 인프라에 대한 원주민들의 접근성은 물리적으로 얼마나 가깝냐보다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인식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

그 괴리가 좁혀지지 않고 있는 곳.


가장 미국 같은 나라 코스타리카.

미국에서 온 은퇴이민자들과 여행자들 덕분에? 중미에서 가장 비싼 물가를 자랑하는 나라.

그럼에도 발길을 이끄는 매력적인 자연이 있는 나라, 

하지만 산과 정글이 많아 도로는 정말 구리다.


pura vida (pure life)라는 삶의 모토 덕분인지 실제로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들보다 여유가 있어서인지 어딜 가나 현지 여행객을 만나기 쉽다.

우리가 여행하면 만난 티코들은 친절하고 좋았는데 다른 중미나라 사람들은 코스타리카 사람을 제일 별로라 한다. 약간 깍쟁이 느낌?

누구는 중미에서 특이하게 일찌감치 별 갈등 없이 친미정책을 펼친 점을 pura vida의 태도로 설명하기도 하더라.


코스타리카에 있다가 니카라과에 들어서면 비로소 진짜 중미가 시작되는 것만 같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소득이 낮은 나라이기에 코스타리카와의 격차는 쉽게 체감되고

실제로 코스타리카의 커피농장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니카들.

겉으로는 조금 더 거칠어 보이지만 이야기 나눠보면 훨씬 따뜻하고 순수한 사람들.

쭉쭉 빠진 멋있는 화산들이 정말 많은데 그래서인가 니카 커피에서는 정말 흙맛이 난다.

코스타리카에는 없는 예쁜 콜로니얼 도시들이 존재하고

도시 곳곳 혁명과 내전의 역사가 묻어나는 동상과 그림들을 볼 수 있다는 점 또한 매력.

근데 이 모든 매력을 이기는 더위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선풍기 앞에서 동공 풀린 눈으로 멍 때린 게 함정.


니카라과에서 엘 살바도르 가면서 어쩔 수 없이 지나가느라 두 시간 정도 차로 달린 온두라스.

중미 모든 나라 사람들이 지금 라틴 아메리카에서 치안이 가장 안 좋은 나라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그래서 그런가, 단 두 시간 있었던 온두라스의 인상은 정말 우울했다.


중미에서 가장 작은 나라 엘 살바도르.

니카라과 들어서면서 과테말라 생각이 나서 그 사이 엘 살바도르도 비슷할 거라 생각했는데 입국하는 순간 다시 미국이더라.

여기도 무진장 더워서 멍만 때리다 나온 관계로 잘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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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역사를 함께 하다가 지금의 국가 형태로 나뉜 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어쩜 이렇게 다를까.

고작해야 한 나라에 2주 정도 머물렀던 이방인의 단편적인 관찰이지만.


이 신기하고 재밌는 중미의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그리고 그동안 일어난 참사,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한동안 여행을 하면서 나에 내면에 맞춰져 있던 초점이 나를 둘러싼 역사로 옮겨져 갔다.


멀리서나마 인터넷으로 접하는 내가 살아온 곳의 현재는 참 슬프고 절망적인데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아서

이건 내가 살아온 역사를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한 무지함에서 비롯된 몰이해인지

너무나 창의적인 사람들이 많은건지 잘 모르겠다.


적어도 오늘 벌어지는 역사를 통해 나와 너와 우리는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달라지면 좋겠다. 

달라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