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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공기/수진이방

가지가지 모로코








밀린 포스팅이 줄줄이 올라오는 걸 보면 알겠지만, 쉬고 있는 중이다.

지금은 모로코, 다음은 탄자니아. 항공이동 구간이라 대충 일정을 짜고 미리 항공권을 구매해버린 덕분에 모로코에서 시간이 남아 쉬고 있다.


쉴 시간이 없었으면 어쩔 뻔. 볼거리도 매력도 넘치는 모로코지만 여행에서 손에 꼽힐 만큼 힘든 나라 중 하나이기도 한 것 같다.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한 듯한 메디나 안 골목들, 오랜 시간이 묻어나면서도 선명한 색감, 이국적인 풍경, 사막과 낙타까지.

외국인들이 상상하고 보고 싶어할만한 이슬람 국가의 모습은 가장 잘 갖추고 있지만

우리 이전에 가본 이슬람 국가들과 비교하면 가장 이슬람 같지 않은 나라.


걱정했던 삐끼는 생각보다 별로 심하지 않다.

이집트, 인도와 함께 3대 삐끼지옥이라고 들었는데 예전에 이집트에서 당했던 거 생각하면 모로코는 완전 준수하다.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나는 건 세 가지 정도.



#1. 페스에서 사하라 사막투어 거점 도시 메르주가로 향하던 날

페스에서 야간버스를 미리 예약하고 버스회사에 짐을 맡기고 근처 한 시간 거리 메크네스에 기차를 타고 다녀오기로 했는데

넉넉히 시간 계산해서 타기로 한 돌아오는 기차가 갑자기 한시간이 연착이 되어버렸다-_-

연착알림은 아랍어로만 나와서 우린 영문도 모른채 기다리다가 나중에야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알게되었지만 이미 늦어버린 시점.

다른 방도가 없어서 결국 기차를 타고 버스출발시간보다 10분 정도 늦게 도착했는데

버스는 눈 앞에서 이미 저멀리 달리고 있고. 어이없게 맡겨놓은 짐은 우리가 왔는지 안 왔는지 확인도 안 하고 버스에 실어놓았고.

정말 오랜만에 목에서 피맛나게 뛰어서 겨우겨우 버스를 잡아탔다. 죽는 줄 알았음ㅠ

오빠가 먼저 뛰어가고 나는 뒤에서 쫓아가는데 주변에서 모로칸들 우리 보며 웅성웅성. 무슨 일이야 재패니즈? 막 이러면서.



#2. 바로 3일 전, 마라케쉬에서 우린 여행하며 처음으로 도난을 당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매치기. 오빠 아이폰을 훔쳐갔다. 나쁜 놈들!@#$ㅆ**%^)*&^%@$ 가방도 찢어놨다.

기계에 큰 애착은 잘 두지 않는 편이지만 아이폰은 우리 둘 모두에게 여행에서 가장 유용한 물건 1순위.

검색하고 사진찍고 일기쓰고. 암튼 지금은 충격에서 좀 벗어났지만 그날은 정말 멘붕 그 자체.

덕분에 마라케쉬 경찰서 투어도 해봤다.



#3. 오늘

우리는 지금 에사우이라라는 해안도시에서 요양 중.

먹을 것도 영 별로인 모로코였던지라 여기에선 아예 아파트먼트를 구해 밥 해먹으며 쉬기로 했다.

여기 오기 전날은 싼 데 가자며 제일 싼 호스텔 찾아갔다가 여행 통틀어 거의 최악(정확회 말하자면 과테말라 이후 두번째)의 숙소를 만났고

춥고 냄새나는 방에서 잠을 설치고 결국 오빠는 다시 몸살이 났다.

그래서 당장 숙소를 옮기고 어제부터 푹 쉬고 있었는데 아침부터 방청소를 해준다며 사람이 찾아왔다.

우린 쉬고 싶어서 청소 필요없다고 말했더니 이번엔 여기 숙소주인이 찾아왔다. 청소 꼭 해야한다면서-_-

응? 우리가 원하지 않으면 안 해도 되잖아. 아직 방 깨끗해 괜찮아. 했더니

자기가 주인이니까 자기 말에 따라야 한단다. 깨끗한게 이 숙소의 장점인거 알고 오지 않았냐며 싫으면 딴 데 가란다. 헐-_-

듣고 있자니 완전 빡쳐서 엄청 실갱이를 하다가 화장실이랑 부엌만 청소하라 그러고 겨우 끝을 봤다. 아오 빡쳐.



참 가지가지하는 모로코라 가지가지 모로코.



슬펐던 지난 며칠이었다.


아이폰이 사라져서 속상하고 소매치기를 당해서 억울하고

길에 나가면 사람들이 자꾸 도둑으로 보여서 너무 슬프고 친절을 베푸려는 사람들도 의심해야 해서 슬펐다.

훔쳐간 놈이 괘씸해 죽겠는데 그렇게 살아갈 그 놈 인생이 불쌍해서 또 슬펐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더럽고 불편한 것들에 더 무뎌질 줄 알았는데 

오래할수록, 특히나 요즘에는 피곤해서인지 그냥 내 몸 불편하고 잠 못 자는게 싫고 그냥 편한 곳에 있고 싶단 생각이 들어 슬프다.


여행을 하면 무엇보다 마음이 더 너그럽고 여유로워지길 바랬는데

그다지 너그럽지도 여유롭지도 않은 내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슬프다.


이런저런 어이없는 일도 생기고 어이없는 사람들을 만나는게 여행이고 사는 것 또한 그러하겠지만

아직도 그런 상황 속에서 여유롭고 침착하게 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너무나 서툴고 여행하면서 달라진게 없구나 싶어 슬프다.



흐음, 슬럼프는 아닌데 이건 뭘까.

자아성찰의 타이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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