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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공기/수진이방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찬바람이 두 뺨을 스치고 있었다.

꼭 그러려던 건 아닌데 항상 겨울을 피해, 여름을 찾아 여행하던 때처럼 찬바람을 피해 남쪽으로 왔다.


이번에는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게 다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10개월 만에 인도네시아 발리.


원래는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가을까지 '일자리를 못 구하면' '히말라야'에 다녀오자!가 목표였는데

어찌어찌 새로운 계획들이 눈 앞으로 다가왔고 그 전에 한템포 쉬어가자는 의미로 (어떤 이유든 만들어서 왔겠지만),

한국에서 먹고 자고 잉여짓만 하다보니 이런 저질체력으로 준비도 없이 히말라야에 갈 순 없겠다 싶어서


그럼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다시 서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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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지 거의 4개월.


그동안의 느낌은 뭐랄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꿈에서 깨어나 한순간 현실로 돌아오는 그런 생소함은 아니고 (가끔씩 자다 깨면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배낭을 메고 여행하던 일상에서 정착하는 일상으로 천천히 옮겨가는 연속선 상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결혼식을 올리고 바로 여행을 떠났던 우리에겐 사람들이 결혼할 때 준비하는 집이니 혼수니 그런 게 하나도 없어서

아직도 양가 부모님 댁을 오가는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말 그대로 아주 천천히 옮겨가는 중ㅋㅋ


(아마도 지금과는 생각이나 취향이 달랐을 2년 전에 무언가 사놓지 않아서 오히려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아예 들어온 거냐, 다시 나갈 계획은 없냐 이런 것들을 자주 묻곤 하는데

여행 전이나 후나 그런 질문에 답을 하기 어렵다는 건 똑같은 것 같다.


당분간은 여기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 그것에 집중하기로 했고

언제 또 다시 떠나고 싶을지, 다른 종류의 삶을 살고 싶어질지는 알 수 없다.


2년 전 우리는 수많은 갈래길 중 하나를 선택했고 여전히 그 길을 걷고 있다.


"잘 놀다 왔으니 이제 다시 열심히 일할게요." 라고 말할 수 있는 단 한번의 '이벤트'가 아니라

여전히 그 길 위에서 또 다른 길을 만나고 선택하며 그렇게 매일매일 걷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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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하나씩 해나가면 된다고 생각하기에 조급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삶의 변화가 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도, 쉽지도 않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할 곳을 찾고, 그러다 잘 안 되기도 하고, 다시 기다리고,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생기는 일들이 있고

길 위에서 천원 이천원에 울고 웃던 우리가 0이 몇 개씩 더 붙는 일들을 처리해야하는 순간들이 닥치고


삶은 느리고 단순해졌고 돈으로 사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데 

이해할 수 없는 숫자들이지만 당장 집을 구하고 계획을 세우려면 돈을 모른 척 할 수 없는 현실.


그래도 이제는 현실 건너의 다른 삶의 모습들이 실제한다는 사실에 희망을 가지면서

덕분에 조금은 더 자유로운 마음으로 그렇게 한발씩 내딛고 있다.


아끼는 마음에 해주는 조언들도 내 속도에 맞지 않을 때는 띄엄띄엄 걸러 듣기도 하고 욕심 부리지 않고 그렇게.

이번 파도가 힘들면 다음 파도를 타면 되고, 힘들면 내일 타면 되지 뭐!


정신없이 흘러가지 않고 중심을 잡고 싶을 때 역시 여행만큼 좋은 것도 없는 것 같다.


글처럼 쿨하지도 못하고 결정장애도 있어서 즉흥적으로 질러놓고도 

진짜 가도 되나, 괜히 나 때문에 오빠는 불편한 맘으로 가는 게 아닌가 걱정걱정했는데

도착하니 웬걸, 둘 다 얼굴이 쫙 펴서 모든 걸 잊고 이너피스를 되찾는 중.


따뜻한 공기에 저절로 말랑말랑해지는 몸처럼 마음도 더 말랑말랑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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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에서 꼭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해 많이 배우고 돌아와서

이제 우리의 목표는 최대한 가볍게 우리만의 공간을 꾸며가는 것.


가볍지만 좋은 생각과 좋은 기운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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